김유담 《스페이스 M》

엄청 금방 읽었다. 자만추한 책이라 사전 정보가 없어서 그럭저럭 재밌게 봄. 그런데 그게 다라 살짝 아쉬웠다. 가볍게 읽기에는 좋은데 그만큼 설정도 약하고, 테제를 던져 놓고 주변을 서성거리기만 하다 끝난 느낌. 하지만 볼륨을 생각하면 담백 깔끔한 결말이라고는 생각함.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유령 이야기라고 해서 본 건데 속았다. 읽다가 정신 혼미해져서 몇 번 덮음. 주인공이 엄청 억제된 무자각 통제 성향이라고 느껴졌다. 어머니가 되고 싶은 그런 것보다는 뭐랄까... 주인어른이 실제로는 부재한 이 저택에서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런 디테일한 인물 백그라운드보다는 확증편향을 잘 활용한 복선 소설쯤으로 받아들이고 보는 게 더 낫지 않나? 워낙 모호한 문체에 1인칭 시점이라 흐름에 의식을 맡기고 봐야 돼. 그래야 결말을 봤을 때 홀린 듯한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음.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읽으면서 찔끔 울었다. 12월이 되고 읽었으면 후반부에 더 따스함을 느꼈을지도. 못 본 척 지나가도 되는, 혹은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는 건 정말 있을까. 있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싶고. 요즘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게 기본값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따뜻함을 향해 가면 좋겠다. 제목처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유로운 세상이 필요해.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았어야 했을 일은 지나갔"을 때의 상쾌함이 더 널리 퍼지기를. 옮긴이의 말처럼 다 읽고 첫 문단으로 돌아갔을 때 느낌이 참 묘하다. 여러 번 읽으며 내가 놓친 사소한 것들은 무엇인지 확인해도 재미있을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의 감상은 지금의 감상대로 완벽해서 이 감동을 한동안은 누릴 듯.

 

이디스 워튼 《여름》

후반으로 갈수록 착잡해서 속에서 비명 지름. 중간에 뭐 찾아보느라 출판사 서평을 봐버렸는데 글쎄 '삼각관계'라고 쓰여있는 거야. '설마 로열-체리티-하니?' 했더니... 네 그거 맞았고요. 이건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호러 소설이다. 이걸 로맨스로 팔다니. 성장 소설도 잘 안 와닿음. 하니는 책임감도 없고, 채리티를 떨떠름하게 만들던 '공정함'이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 로열이 그냥 늙남이기만 했어도, 아니 물론 이것도 싫은데 이 새끼는 그냥 늙남도 아니고 사실상 아버지에(우욱) 소유욕ㅋ에 눈이 멀어 채리티한테 갈보네 뭐네(뒤져라) 하던 미친놈이라 커버가 안 된다. 채리티가 브로치를 되찾는 장면이 아무래도 많이 언급되는데 그가 전략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저항하고, 선택하고... 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너무 슬펐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엔딩 이후에 아이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길 기도하는 것뿐이라는 게. 하지만 내용과 별개로 이디스 워튼이 계절의 심상을 가져와 배경을 밀도 있게 채우는 구성력만큼은 좋았다. 원문이 조금 더 간결한 느낌이었던 것도 흥미로웠음.

 

김보영 《미래로 가는 사람들》

단위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하나(개인)가 전체, 전체가 곧 하나 테마를 우주적으로 덤덤히 풀어낸 작품이라 느껴졌다. 김보영 작품은 여명의 이미지가 강해서 건조하되 허무하지는 않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강점 같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작품 전체로 봤을 땐 여전히 《종의 기원담》이 더 흥미롭다.

 

희석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

"가이드북을 표방한 이 책은 사실상 여행자 당신께 보내는 구조 요청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애초에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사지 않을 듯. 대체 세상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분명 나아지고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늘 미미하고 혐오만이 형형하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작가가 과장이 심하네;' 이러고 넘기고 싶다. 아냐 사실 그것도 싫고... 내 마음은 뭘까 엉엉엉.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두아 리파 노래 가사 생각 났음. If you're offended by this song You're clearly doing something wrong.

 

조예은 《칵테일, 러브, 좀비》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 앞의 두 단편은 그저 그랬고, 〈칵테일, 러브, 좀비〉와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재밌게 봤다. 그런데 딱히 작품간의 기복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엄마'라는 소재에 약하고, 타임 패러독스를 좋아해서인 듯. 그렇지 않아도 최근 '동생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참이라 그런지 뭔가 더 몰입이 잘 된 것 같기도. 

 

한강 《희랍어 시간》

먹먹함이 이어지다가 〈9 어스름〉에서 엉엉 울었다. 앞서 말했듯 근래 동생에 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서 불가항력이었음. 정신차리니까 코 풀고 있었다고. 상황이 비슷해서 그랬을까... 내가 그 애한테 해주고 싶은 말인지 내가 듣고 싶은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지 슬펐다. 그리고 작품 전반에 걸친 이런 분위기가 쉼 없이 페이지를 넘어가게 만들었다. 추천사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라는 말처럼 점과 점이 맞닿는 이야기라 더 좋았다.

 

김보영 《다섯 번째 감각》

기억에 남는 작품은 네 편 정도 된다. 여러편 읽고 나니 느낀 건데 나는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인물이 대화로 서로를 이기려 하는 구도를 좋아하는 것 같다. 거기에 뭔가 인물이 광신도적인 면이 있으면 더.

〈땅 밑에〉

'땅을 내려다보며 기도를 드렸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소설일까? 아이디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도 굳이 고르자면 순환의 기점은 하늘보다는 땅이라고 생각해서. 땅에 끌리는 사람의 이야기라니. 하강자라는 직업도 매력적이었다. 다만 나락의 끝에 도달하고 나서부터는 정말 어렴풋하게만 상황을 상상해 볼 뿐이라서 그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이 부분 정확히 작가의 말에 언급되어 있어서 웃겼다. 그래도 이러나저러나 주인공이 땅에서부터 솟아난 듯한 이미지를 주는 건 좋았음.

〈촉각의 경험〉

재밌다. 이거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캐릭터도, 소재도, 전개 방식도. 어렵지 않고 친숙한데 김보영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서 좋았다 (약간의 유머러스함까지도). 결말이 언뜻 그려진데다 실제로 그러했는데도 그 과정이 잘 설득돼서 '음 맞는 결말이군' 싶었달까.

〈다섯 번째 감각〉

왜 표제작인지 알 수 있었던 작품. 아무런 정보 없이 읽어서 더 반전 있고 재미있었다. 라기엔 제목부터가 너무...지만.

〈스크립터〉

로봇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 관한 논쟁은 정말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거다' 싶은 표현을 만나지도 못했다. 이 소설도 엇비슷한 주제로부터 시작되는데 배경이 게임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웹소설도 게임 배경이면 괜히 더 읽어보는 편이라. 중간에 '이런 흐름이라고?' 하고 살짝 재미가 반감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그 이후부터 대화가 몰아쳐서 좋았음. 작가의 말을 보니 원래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형식으로 쓸 생각이셨다는데 그래서 그랬나. 저는 오히려 좋아요...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계절의 상징 같은 시인들이 있다. 이유를 물어도 '그냥... 그런 거야...' 정도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는 점까지 낭만적임. 눈이 와서, 다시 읽고 싶은 몇 편의 시가 생각나서 오랜만에 최승자 시집을 읽었다. 역시 좋구나~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 최고는 《이 時代의 사랑》이기는 해.

 

문목하 《돌이킬 수 있는》

추천받고 읽은 책인데 스포 없이 봐서 다행이다 싶었다. 캐릭터 배치, 전개방식, 사건 해결까지의 템포, 결말 등등 웹소설을 읽는 느낌이 강해서 순식간에 읽었다. 초반이 잘 안 읽히기는 했는데 한 중반쯤 읽으면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싶고... 그나저나 내가 기승전 사랑(하지만 너무 성애적인 건 조금...) 선호 인간이라서 정여준의 마음을,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테제를, 너무 납작하게 해석하는 걸까 봐 의식적으로 환기해 가면서 봤다가 결말 읽고 고함질렀다. 하 말이 안 된다고. 좋다는 뜻임.